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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교회의 특별한 교리가 있습니까?

대구교회의 특별한 교리는 없고, 개신교에서 확정된 기본 교리를 존중하나, 교회는 오로지 유일하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의 살으심과 죽고 다시 살아나심 안에 있는 한 인격위에, 그 인격을 중심(생명)으로 세워져야 하고 그 인격을 살아내야 하기 때문에 교리나 제도 등에는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대구교회에서는 무엇을 믿고 있나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체가 되신 하나님의 독생자라는 것과 그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 죽으셨고, 우리를 다시 나게 하기 위해 부활하셨으며, 사탄을 정복하고, 하나님 우편에 오르신 것과 우리 생명이 되시기 위해 그 영(성령)으로 다시 오셨음을 믿으며, 그리고 그 영께서는 우리 안에서 생명으로 역사하여 다가 올 새 예루살렘을 예비하게 하신 것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신기한 지혜와 능력으로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 안에서 옛 인류를 끝내시고(죽음) 새 인류를 창조(부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누구나 새 피조물입니다. 이 은혜는 놀랍지 않습니까! 그리고 이것 이외에 더 중요한 것이 또 무엇이 있겠습니까! 교리란 단지 성경의 가르침에서 빗나가지 않게 하려고 사람들이 추려 정리해 놓은 것임으로 빗나가지 않을 정도만 알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대구교회는 다른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인종도 종교도 문화도 다른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들 중 예수를 사랑하고 예수를 자신의 구원자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들인지 모릅니다. 교파가 다르고 삶의 방식이 다르다 할지라도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사랑하고 그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한다면 내 형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본질적인 것에는 일치를, 비본질적인 것에는 자유를, 그리고 모든 것에는 자비를!” 우리는 이 말에 동의합니다.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바울이 한 이 말씀처럼,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전파된다면, 다른 것에는 자유와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비본질적인 요소들, 이해의 차이, 해석의 차이, 의식이나 모양이나 생활 같은 문화적 차이로써 서로 판단하고 정죄하기 시작한다면, 주께서 피로 사신 몸 된 교회를 다시 찢어 나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나는 모든 교회들이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특별히 한국민족은 단일민족, 백의민족이라 하면서 단세포적 사고를 하며 살았고 흑백논리로 쉽게 남을 정죄하는 태도를 보여 왔습니다. 지금은 더 이상 단일민족도 백의민족도 아닙니다. 그런데도 의식은 아직 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사람의 눈과 귀가 다 다르게 생겼듯이 똑같은 것을 듣고 보아도 이해와 해석이 모두 다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부분에서 내가 공감하고 어떤 부분에서 내 생각은 다르다고 말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해의 차이를 가지고 서로 옳고 그름을 다툰다는 것은 종교 유아기적 현상인 것입니다. 이런 문제는 로마 가톨릭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국교가 되면서 기독교는 황제가 만든 규격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성경을 해석할 권위는 로마 교황청만 독점하였습니다. 일반 신자들은 성경을 읽을 권리도 해석할 자유도 없었습니다. 핵심적인 내용이 요약되고 체계화되어 ‘교리’라는 이름으로 가르쳐 졌습니다. 교리를 주문 외우듯 하게 되었고 교리를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들에게 이단이라는 딱지가 붙었습니다. 교회가 정치적으로 힘을 가지게 되었을 때, 로마 제국이 교회를 박해했던 것처럼 로마 교회는 자기들과 생각을 달리하는 사람들을 박해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기독교의 전성기는 중세 천년 암흑기가 된 것입니다. 교리는 생명이 자라도록 돕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생명을 위해 있어야 할 교리가 생명을 통제하고 제한하게 된 것입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사람을 정죄하고 죽이는 일이라면 오히려 해악한 것입니다. 예수께서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라고 하신 것처럼, 일보다 사람이 중요하고, 지식보다 생명이 중요하며, 읋음으로 판단하는 것보다 살 길을 열어 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런 관점이 회복되지 않는다면 종교는 옳음을 내세워 사람을 죽이는 일을 되풀이하게 될 것입니다. 종교개혁의 가장 중요한 공헌은 모든 사람들의 손에 성경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교권으로부터 성경을 해방시켰습니다. 누구라도 성경을 읽고, 성령의 조명하심 아래서 성경을 자유롭게 해석할 수 있게 한 것입니다. 무엇도 해석과 이해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사람 속에 받아들여지는 것은 없습니다. 성령께서 직접 말씀하신다 해도 사람에게 이해된 후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똑같은 말씀을 들어도, 사람의 이해는 모두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개신교는 수많은 종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지만 생명 안에서 본다면, 큰 나무는 수많은 가지를 뻗으며 자라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는 모든 것에 열려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 안에 계시기 때문입니다(골3:11). 주님은 우리 앞에 항상 열린 문을 두셨는데, 아무도 닫을 사람이 없다고 하셨습니다(계3:8). 인위적으로 만든 것은 더 많은 문제를 가져오게 되고, 로마 교회가 그러했던 것처럼 그것은 필연 사탄에게 이용될 수밖에 없습니다. 혼란을 두려워하여 획일화의 길을 가다가 생명력을 상실해 버렸습니다. 아무 형상도 만들지 말라 하신 분을 섬기면서 틀을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틀 속에 가두는 것이 되어버립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을 신뢰하고 맡겨야 합니다. 그러면 생명나무가 열두 종류의 열매를 맺듯이 교회들은 다양함과 풍성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다른 종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중동에서 발생한 종교는 대부분 유일신을 믿습니다. 그래서 유대교는 지독하게 배타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배타적이거나 독선적인 분이 아닙니다. 더구나 유대인의 독선도 이방인의 야만성도 다 하나 되게 하는데 방해되는 것이므로 십자가로 이것들을 허물고 화평케 했습니다(에베소서2:14 참조). 많은 기독교인들은 십자가의 도를 단지 사랑과 희생의 정신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분열을 본성으로 하는 옛 사람을 끝내는 것입니다. 교회는 바로 이 분열의 종식으로부터 나온 부활(새 사람)을 본성으로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의 예수를 깊이 묵상하고 영접한다면 결코 배타와 독선에 빠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른 종교도 인정한다는 말이냐고 즉각 반문할 것입니다. 한 종교는 다른 종교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종교와 종교의 벽을 없애기 위해 죽으셨습니다. 죽으면 모든 것이 끝입니다. 이 끝남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부활이요 생명입니다(요한복음11:25 참조)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종교들이 어느 한 종교로 흡수 통일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유일한 종교를 만들려고 오신 분이 아닙니다). 그러나 십자가(죽음) 앞에 서면 모두 하나일 뿐입니다. 물론 또 그 분열의 본성은 천당과 극락을 가르려고 하겠지요. 그러나 죽음 안에서 인류는 하나입니다. 또한 죽음 안에서 인류는 그 누구나 똑같은 사람이고 숨이 코에 붙은 인생입니다. 무엇이 다릅니까? 그러므로 그 죽음 안에서 우리 모두는 겸손하게 인생을 깨달아야 합니다. 남에 대해서 이러니저러니 할 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먼저 죽음(십자가) 안에 있음으로서 다시 사는 사람임을 알고 다시 난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들을 본다면 분열이 없어지고 연합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숨이 코에 붙은 인생들끼리 또 편을 갈라놓고 담을 치고 철조망까지 설치한다는 것이 얼마나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까우시겠습니까? 이것은 하루살이들의 패권다툼이 아닐까요?

은사나 기적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성경에도 은사가 있고 이적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있는 것이 당연하겠지요. 다만 저에게는 말씀 전하는 은사 외에 이적을 베푸는 능력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저의 일생은 모두 기적의 연속입니다. 20세 때 다들 죽는다고 했습니다마는 죽지 않고 살아났습니다. 폐결핵으로 폐가 거의 망가졌습니다. 시골에 살았고 의료의 혜택이 지금처럼 광범위하고 평이하게 주어지지 못한 시기였기 때문에 잘 모르고 그 지경까지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광주제중병원(당시 결핵 병원)에 입원 했을 때는 담에서 균이 많이 나왔습니다(직접 도말 검사 결과). 그런데 약은(당시에는 SM, 아이나, 파스 세 종류의 약뿐이었음) 이미 병원에 오기 전에 다 썼고 더 이상 쓸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단지 누워서 안정을 취하는 길밖에 없었는데, 기이한 것은 2개월 후에 집균 검사 결과 균이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결핵균이 두 달 만에 없어지는 균이 아닙니다. 최소한 1년 이고, 저 같은 경우에는 몇 년을 약을 먹어야 될지 모르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된 것인지 두 번 세 번 검사해도 균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것이 이적이 아니겠습니까? 그 외에도 많지만 다 말할 수 없고 인생 자체가 이적으로 이루어진 사람입니다. 지금 폐 사진을 본 의사들은 다 의아하게 생각합니다. 이런 폐를 가지고 70이 넘도록 살고 있느냐는 것이지요. 그래서 나는 이적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는 그런 이적을 행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런 은사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의 할 것도 없지 않습니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것 같은 이적입니다. 이것들이 참 이적과 섞여 있어서 혼란스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죽을 사람이 살아날 수 있다면 그런 병이 고쳐질 수 만 있다면 진짜이든 가짜이든 무슨 상관입니까 먼저 살고 봐야지요.

대구교회라는 이름의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대구교회라는 이름에는 특별한 의미가 없습니다. 바울은 교회는 하나님의 교회요(고전1:2), 그리스도의 몸(고전12:27)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과 본질에 적합한 이름을 찾다가 그 지역 이름을 딴 명칭이 적합하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요한은 계시록에서 일곱 교회를 말하면서 ‘에베소 교회의 사자에게,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하면서 그 지역의 이름을 교회의 이름으로 하였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의미와 특색이 없는 지역 이름을 사용한 것입니다.

찬송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찬송이란 성경처럼 고정된 것이 아닙니다. 지금 한국교회에서 사용하고 있는 600곡 찬송가는 기독교 역사에서 여러 사람들이 은혜를 통해 작사 작곡한 것들 중에서 선별해서 편집한 것입니다 (장로교, 감리교, 안식교에서 부르던 것을 합해 놓은 것이 합동찬송가임). 찬송은 당연히 그 시대에 그 사람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시대가 달라지고 경험이 달라지면 다른 내용의 노래를 부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그래서 저희는 이곳저곳에서 우리 심령에 맞는 것이 있으면 어떤 것이라도 취해 부르고 있습니다. 고정된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찬송이 고정되어 발전하지 않는다면 교회의 신앙이 죽은 것입니다. 저도 옛날에는 600곡 찬송가에 있는 노래만 찬송가인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청송교도소 출신의 형제가 나와서 찬양을 하겠다고 해서 하라고 했더니 유행가 곡에다가 가사를 새로 붙여서 부르는 것이었습니다. 처음 잠깐 동안 조금 의아해 했으나 깊이 생각 해 보니까 저 형제에게는 저 노래가 참 찬송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저부터 찬송가에 대한 고정관념을 벗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받은 은혜를 표현하는데 어떤 노래면 어떻습니까. 하나님이 참으로 원하시는 것은 자녀들이 축복에 젖어 부르는 노래가 아니겠습니까.

기도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젊었을 때는 저도 어떻게 하면 밤을 새워 기도할 수 없나? 금식하며 기도할 수 없나? 이런 문제로 많이 고심했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깊이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그저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리고 그래야 교회가 되니까, 그랬던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해 깊이 생각한 결과 이상한 말이지만 오늘 한국교회는 기도를 너무 많이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요? 종교마다 기도가 있고 이 기도가 그 종교를 유지하는 핵심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 무엇을 위한 것이며 누구를 위한 것인가? 그것이 하나님을 위한 것인가. 자신의 소원을 위한 것인가? 참으로 어지럽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했고 예수님은 기도를 가르쳐 주셨습니다(주기도). 그러나 그 후에(부활이전) 제자들은 한 번도 그 기도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급하고도 애절하게 기도를 요청한 일이 있습니다. 그때 어떠했습니까? 그들은 모두 자고 있었고 예수님만 피땀 흘려 기도하였습니다. 아이러니컬하지 않습니까?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조를 때가 언제인데 기도를 하자고 하니까 자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깊이 생각해 볼 일입니다.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위해서 기도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이 가르쳐준 기도만 평생 한다면 좋겠습니다. 온 교회가 이 기도를 위해 새벽마다 몇 천, 몇 만 명씩 모인다면 하나님 나라가 곧 올 것입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래서 저는 누구든지 정말 기도하고 싶을 때, 주님을 위해, 그 나라를 위해 기도하고 싶을 때 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역시나 기도를 많이 안하더군요.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기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습니다. 언젠가는 우리교회 모두가 그렇게 할 날이 올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를 위한 기도 말입니다. 기도는 배워서 하는 것이 아니라 속에서 우러나와야 합니다. 절이나 교회에서 어찌나 기도를 많이 하는지 하나님과 부처님이 혼란스러울 것 같습니다. 대구교회에서는 헌금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대구교회에서는 헌금을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초기에는 헌금이 거의 없었습니다. 아주 초기에는 이재승형제가 학원에서 영어강의 해서 얻은 수입으로 집에 오는 학생들을 대접하다가 다음에는 내가 조그마한 사업이라도 해서 필요를 충당하겠다고 나섰지만 실패했습니다. 그 다음에는 제천에서 양장점을 하던 아내가 이사를 와서 동네 안에 양장점 개업을 하고 본격적으로 해 보려고 했는데 얼마 못하고 허리를 상하여 그만 모든 것을 접게 되었습니다. 헌금보다는 내가 좀 벌어서 오는 분들을 대접하고 편히 쉬고 놀다가게 하고 싶었습니다마는 뜻대로 되지 않았습니다. 그때 취직시험 공부를 하고 있던 형제들이 비로소 취직을 해서 그 월급으로 30 여명의 식구가 함께 먹고 살게 되었습니다. 정식 헌금은 그 후 약7,80명의 사람이 모였을 때 자발적으로 조금씩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식구 먹고 사는 것 외에는 돈 쓸 일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특별히 헌금을 안 해도 되었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때그때 필요를 채워주시는 분에 의해서 집회장소도 구하고 전기료도 내고 했지요. 헌금에는 문제가 많습니다. 그래서 저는 어떻게 하면 헌금 없는 교회를 할 수 없을까에 대하여 오랫동안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헌금이 없을 수는 없고 자원하는 마음이 있는 자가 한다면 참 복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돈이 있다면 혼자 다 담당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그러나 저에게는 돈을 주시지 않았고 대신 말씀을 주셨습니다. 돈을 선물로 받은 사람들은 그 돈을 복으로 바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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